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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_아동 학대에 숨겨진 심리 독서장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조경숙


체로키 인디언 혼혈인 포리스트 카터의 자전적 소설.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자라던 작은나무. 그러나 인디언의 인권이 묵살당하던 시절 당국에 의해 강제로 보육 시설에 맡겨진다.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담당하던 목사는 작은나무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생아는 어떻게 해도 도저히 구제 받을 수 없다."
나는 인디언들이 엄마와 아빠를 결혼시켰다고 얘기 했지만, 무시당했다.
목사는 말한다.
"넌 악의 씨를 받아서 태어났어. 그러니 애초에 너한테 회개 같은게 통할리 없다는걸 알고 있어.
그렇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너의 사악함이 다른 기독교도들에게 물들지 못하도록 가르쳐 줄 수는 있지.
회개하진 못하겠지만 울게 만들 수는 있지."
그는 굵다란 막대기로 내 등을 내리쳤다.

제임스 길리건은 폭력에 대해서 수치심과 모욕감을 피하거나 제거해 정반대 감정인 자신감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저 부분에서 나는 폭력에 숨겨진 또다른 감정을 읽었다.
감히 인디언 주제에 백인 여자를 넘보다니..와 같은 모욕감과 질투심. 그리고, 외부인과 성행위에 대한 혐오와 죄책감.


혐오... 는 뭘까?
행복의 가설에서 조너선 헤이트는 혐오를 이렇게 설명한다.

주로 동물 및 동물의 몸에서 나오는 부산물과 관계있는 감정.
동물의 죽은 사체, 피와 배설물, 죽음, 섹스, 온전치 못한 신체 외형, 비위생적인 음식.

혐오감은 욕구(배고픔)을 없애고 씻기나 그것이 너무 늦었을 경우 구토 같은 정화 행동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혐오감의 생물학적 기원은 인간이 먹으면 안되는것, 식중독이나 전염병을 일으킬 수 있는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은 식물이나 무기물에 대해선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외부인에 대한 혐오는 외부인이 옮길 수 있는 세균, 바이러스에 대한 본능적 반응.
여성 혐오는 성행위 자체의 수치심과 그 행위로 옮길 수 있는 성병, 에이즈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성욕을 없애기 위한 기제
.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인간이 혐오 감정을 일으키는 것들을 금지하는 계율이 있다. 종교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어쨌든 식물을 먹지 말라는 금기는 못들은것 같다. 혐오 감정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것들과 접촉, 먹는 행위에 대해 엄격히 금지하고 그것을 어기는걸 죄악시한다. 그러니까 동물적인 모든건 혐오의 대상이고 그것을 제외한건 신성하다.
야만인(외부인)과의 교합으로 태어난 아이 또한 혐오의 대상이다.
아동 학대엔 성에 대한 혐오가 숨어있다고 본다. 폭력에 대해 관찰한 결과(많은 사례는 아니지만) 성을 터부시하고 죄악시하고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일수록 아동 역시 통제하고 싶어하고 벌줘야 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아동은 자신의 죄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니까. 그 자체로 죄악이다. 그러니까 넌 맞아야 해.

그리고 그렇게 학대 받고 자란 아동은 나중에 그 분노와 복수심을 다른 사람에게 풀거라는 가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위키백과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찾았다.


1976년 뉴욕 타임즈는 포리스트 카터가 인종차별주의자 아사 카터와 동일인물이라고 폭로했다. 1956년에 아사 카터는 테네시 주의 클린턴에서 12명의 흑인 학생이 백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에 반대하여 분리 정책을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그 영향으로 200명의 폭도들이 흑인이 운전하는 버스를 린치하는 등 폭동을 벌였다. 그가 조직한 그룹이 1950년대 흑인에게 린치를 가했고, 내부 분열 때문에 살인까지 일어나 버밍험 경찰은 한때 그를 고소하려고도 했다.

카터가 이끄는 KKK단의 클랜원들은 흑인 노동자를 공격해 성기를 절단하고, 그 위에 기름을 퍼붓고 트렁크에 가두어 놓은채 가버렸고 그 피해자는 그렇게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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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동자에게 가한 폭력에서 그의 성에 대한 태도가 잘 드러난다. 그것만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깊은 혐오. 어린시절 폭력과 함께 주입받은 혐오 감정. 범죄는 그 감정의 노예가 된 인간이 행동한 결과다.
실제 아사 카터가 누구에게서 그런걸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현재 그걸 사람들 머릿속에 주입하는 주체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앞에 글에서 말한 종교고, 나머지 하나는 포르노다.
예전에 어떤 판사가 예술과 포르노에 대한 기준에 대해 묻자
"보면 압니다."라고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던게 기억나는데...
나에게 기준을 묻는다면, 여성에 대한 비하나 성행위에 대한 혐오가 있으면 포르노라고 분명하게 대답하겠다. 죄책감이 드는건 그것 때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내 경험이다.
남동생이 갓 제대한 후에 없어진 내 옛날 포털사이트의 아이디랑 비밀번호를 물은적이 있다...
"그런게 생각날리 없잖아. 왜?"
"어, 소라넷 비번을 잊어버려서. 누나 이름으로 가입했거든."
헐~ 나 모르는 사이 명의도용이 일어났었군. 저걸 확 패줄까?
옛날에 컴퓨터가 집에 한대 있던 시절엔 남동생의 직박구리 폴더 아무 생각없이 열였다가 내눈도 덩달아 더러워졌었다. 그것들이 내 이름으로 결재된 거였다는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어쨌든 왜 더러운 느낌이 들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포르노가 성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더라고.
혐오감.. 뭐가 문제일까?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로 했던 이유를 검토해 보자.
남성은 자신이 쓸모 없다고 생각할수록 폭력적이 돼.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동료가 죽었는데도 여성과 그짓을 하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지겠냐는 거지.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죄책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을 혐오감이나 죄책감으로 덮는다.
위안부가 필요한 이유는 남자들에게 혐오와 죄책감 같은 부정적 감정을 심어주어 스스로가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전쟁터에서 도망가거나 적에게 투항할 대안을 찾지 않고 총알받이로 죽게 만들기 위함이지. 적과 함께 용감하게 죽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자신의 목숨을 지킬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곤란하잖아?
혐오감과 죄책감은 전쟁터에 나가면서 어차피 나는 죽어도 상관없어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고 무감각하게 사람을 죽이는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본다. 내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데 남의 목숨이라고 소중하겠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은 그들이 전쟁에 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포자기.. 스스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누군가 그것을 주어야만 한다. 그렇게 격렬하게 저항하던 일본군들이 지고 나니까 너무나 협조적인 것에 미군들은 깜짝 놀랐고 당황했다고 전해진다. 어떻게 하루 아침에 사람의 태도가 그렇게 180도로 변할 수 있는지.
일분군들은 미군이라는 명령을 내려줄 강력한 새 주인을 만난 것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강력한 새 주인에게서 찾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죄책감을 가진 인간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며 그들은 그것에 만족했기 때문에 협조적이었던 것이다.

범죄 심리학에선 강력 범죄를 살인범이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있으며 어린시절 자기의 모습을 희생자에게 투사해서 격렬한 자기 혐오를 표현하는 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카터의 경우 자신이 구제받을 수 없는 악의 씨앗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자기와 구별되는 흑인을 공격함으로써 부인하려고 시도하고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악의 화신이며 구제 받을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거나..
카터는 자신이 악의 씨앗임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건 마찬가지다.
방법은 혐오와 죄책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것 뿐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남이 정의하도록 두지 말라. 스스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믿어야지 스스로가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믿어선 안된다는 소리다. 그건 남이 놓은 말의 덫에 걸려드는 것과 같다. 죄책감이라는 덫.
죄책감을 주입하려는건 나르시시스트가 남을 조종하기 위해 써먹는 수법일 뿐이니까.
종교와 포르노가 성에 대한 죄책감을 퍼뜨리고 나르시시스트는 그것을 이용해 약점을 잡고 사람들을 조종하는게 각종 정신질환, 예컨대 인격장애와 우울증과 무기력과 범죄가 발생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결론은 이렇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가치, 자신의 가치를 믿으라는 것이다.
건물에 불이 났을 경우 사람을 구할때를 생각해보자. 구조 상황에선 그 사람의 인종, 나이, 성별, 심지어 범죄자인지 아닌지 구별하지 않고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우선 순위도 없다. 인간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엄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은 그런 개념이다. 물질적 분배라는 개념에 평등이란 단어를 끼워 넣어 평등이란 단어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데 반대다.
그 존엄을 믿는 사람만이 죄책감을 이용한 외부의 조종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시민이고, 진정한 시민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다.


덧글

  • dex 2019/08/08 18:42 # 삭제 답글

    성을 너무 관념적으로 접근하신 듯 하구요. 처음 가정으로부터 검증없이 니무 멀리 가신 것 같습니다. 처음 가정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계속되는 논리전개는 뭔가 30%의 30%의 30%의 30%를 얘기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 모래소다 2019/08/08 20:17 #

    성이 아니라 아동학대에 관한 글입니다. 폭력에 숨겨진 심리를 묘사한 겁니다. 사실이 아니라 어긋나고 비뚤어진 심리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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