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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 심리학

방과 후 보조교사로 있을때 일이다.
1~2학년 컴퓨터 시간.
아이들을 방과후 교실에 보내는 엄마들은 두 부류다.
뭔가 배워오길 바라는 엄마와 일하는 동안 아이 맡길 데가 없으니까 보내는 엄마.
대부분은 후자 쪽이다.
첫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정신 없이 떠드는 와중에 서로 싸우는 아이들..
당연히 교실 맨 뒤로 가서 서있는 벌을 받아야지.
근데 이 아이들이 다음 시간에도 그 다음 시간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한 아이 자리를 바꿨다.
이번엔 남은 아이가 그 옆에 새로운 아이와 열심히 싸우더라.
급기야 하루는 한 아이가 울길래 왜 우냐고 하니까 옆에 아이가 자기 그림을 지웠다고 한다.
"왜 친구걸 지웠니?"
"....."
양팔로 자기 어깨 감싸고 '사랑합니다.' 하면서 5분 동안 벌서기..
하지만, 벌을 아무리 세워도 계속해서 옆 친구의 키보드를 만지고 마우스를 빼앗으려하는 방해는 멈추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예 친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즉시 다시 원위치로 돌려주면서 1:1 수업했다.
차근차근 순서를 가르쳐주다가 깨달았다.
자기 모니터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고 오로지 친구 컴퓨터에만 집착하는 이유를...
한글을 모르더라고..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알파벳을 모르기 때문에 컴퓨터 수업을 조금 어려워한다는건 알고 있었는데, 한글을 모르리라곤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짜린데 왜 당연히 한글을 다 알거라고 생각했을까? 좀 충격이었다. 나 역시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는데는 젬병이었다.
자판을 읽지 못하니까 전혀 수업을 따라올 수 없고, 심심하고 따분하니까 잘하는 옆 친구 모니터로 고개가 자꾸 돌아가고, 친구가 원을 하나 그리면 자기도 거기에 원 하나 그리고 싶으니까 자꾸 친구 마우스를 가로채려고 손이 나가는 것이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재밌어하고 화면에다 뭔가 그리고 글쓰고 움직일때, 혼자 재미없고 따분하고 혼자만 못한다는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꼈던 거다. 그래서 참여하고 싶지만 자기는 그럴 수 없으니까 자꾸 잘하는 친구에게 간섭하고 친구의 작업에 참여하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혼내는 선생님.. 계속 좌절의 연속인 컴퓨터 시간이 얼마나 싫었을까?
아이들은 물어보지 않아도 아주 소소한 것까지 다 말해주기 때문에, 같은 반 아이들이 주는 정보만으로도 그 아이가 교실에서도 늘 말썽을 피워서 엄마가 교무실로 몇번 불려왔었다는 사실과 교장 선생님까지 나서서 그 아이와 괴롭힘 당하는 아이들 때문에 골머리 앓는 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한글을 모르니 당연히 수업 시간도 못따라 갈테고.. 여기서 있었던 일이 교실에서도 있었겠지.
아이들이 문제아가 되는건 아이들의 발달에 있어 개인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겨우 몇달 차이도 또래 집단에서는 엄청나게 차이나 보인다. 사실 2~3학년이 되어서까지 한글 못떼는 아이는 없다. 하지만 근소하게 늦는다는 것은 좌절과 패배를 경험한다는 것이고 그 경험은 자아상에 있어 부정적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 공부 잘하는 아이, 우등생인 아이들은 대부분 봄에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한다. 입학 기준인 3월 1일에 태어난 아이들이 또래보다 가장 앞서고 겨울에 태어난 아이들은 그들보다 많게는 12개월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능력이 똑같을 수가 있겠는가? 어쨌든 부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은 아이들은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은 아이들보다 뒤쳐지고 그 격차는 점점 커질수 밖에 없다.
아이가 문제아로 낙인 찍히는 기준은 실제로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어른들의 무관심과 편견일 확률이 크다.
문제는 그 아이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부모도 모르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방과 후 교실도 많은데 하필 여기로 보냈겠지.
뭐 아무데나 상관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의 부모는 그정도로 아이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현실이 시궁창 같다고 느꼈던 이유는, 방과후 교사로서 그 아이의 부모에게 그 아이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매우 꺼려졌다는 사실이다. 그 아이의 부모가 기분 나빠하면 어쩌지? 괜히 부모가 아이를 닥달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나한테 적대적으로 나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인간은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그 나쁜 소식과 동일시 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전쟁에서 승전 소식을 알린 병사는 왕으로부터 큰 상을 받지만, 패전 소식을 전한 병사는 재수 없으면 진노한 왕의 분풀이로 죽을 수도 있다. 전쟁의 승패는 전령과는 상관 없지만, 전령이 그 책임을 모두 뒤집어 써야 한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왜? 인간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니까.. 또는 대상에 무관심 하니까.
어쨌든 우리의 말썽꾸러기가 친구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옆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낌새만 있어도 고개 반드시 앞으로 돌려주고 매우 친절하게 아이콘도 다 찾아 눌러주고 자판도 쳐주고, 가끔 게임도 시켜줘서 컴퓨터 시간이 재미없다는 기억을 지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재미는 배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남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를까봐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에릭 호퍼는 말했다.
내 관찰 결과를 덧붙이자면, 남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통제광들은 실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제할 자기 자신이 없으므로 남을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
스스로 성장시키고 발전시킬 자아가 없는 사람. 또는 그런 자아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
즉, 자신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남의 능력, 남의 가능성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 하거나 그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아의 성취감과 성장하고 발전하는 기쁨을 남을 통제하는 기쁨으로 대체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마침내 해냈을 때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도취감과 몰입은 느낄 수 없다. 즉,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남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자신과 남의 행복을 계속 지워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참나무는 50년을 커야 도토리를 맺을 수 있다고 한다.
작은 도토리에는 커다란 참나무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하는건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지 진짜 가능성이 없는게 아니다.
도토리를 보고 '넌 가능성이 없어.'라고 말한다고 도토리가 참나무로 성장하는걸 포기하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너무 쉽게 성장을 포기해 버린다.


왜?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또, 성장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좀더 사랑하지 그래?"라고 말했을때,
화를 냈던 이유는 사랑할 자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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